새벽 5시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하루종일 걷게 될 코스에, 또 어제 숙소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터라 어찌될지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일찍부터 서둘렀다. 비 예보를 보았으나, 숙소를 나온 직후까지도 날씨는 선선하니 걷기 좋은 날씨처럼 느껴졌다. 안녕, 알베르게.
걷기 시작하려 할 때 이내 비는 내리기 시작했다. 준비한 우비를 첫날부터 꺼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차라리 여행 초입에 이런 어려운 일을 겪어보는 것이 남은 여정의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무조건 긍정적인 생각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도 모자란 카미노.
지루한 오르막은 끝날 듯 끝나지 않고 꼬불꼬불 이어져 나가고 있었고, 그 하늘과 맞닿은 그쯤에 첫번째 포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맑은 하늘이 배경이었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그러나 가랑비가 운치를 더해 주는 묘미가 있었고, 산 정상에서 부는 비바람이 제법 날카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고즈넉한 매서움이라고 해야하나? 무언가 아이러니하면서 이국적인 풍경이 낯섦을 던져주고 있었고, 그것은 내가 길을 걷는 힘을 주고 있는 듯 했다.
바로 옆의 롤랜드 기념비에서 기념사진도 촬영하면서 정상의 기분을 잠시나마 느꼈으나, 계속 내리는 비에 옷과 장갑들이 젖으며 걷지 않으면 쌀쌀한 날씨가 걸음을 재촉했다.
이바네타 성당의 처마에서 잠시 비와 추위를 피하였다. 고개 정상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눈요기를 하고 싶었으나, 짙은 안개와 기상상태로 장비를 재정비하고 길을 나섰다.
비는 폭우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끊임없이 내리는 통에 장갑과 우비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하며 체온을 조금씩 낮추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볼 수 있는 익숙한 표정의 숲길을 따라 걸을 때에 얻은 일종의 편안함이 낯선 곳에서의 추위를 다소 날려줄 수 있었다.
비였던 기상상태는 눈인지 비인지 모를 진눈깨비로 바뀌고, 길은 갈 수록 질퍽거리기 시작했다. 신발 바닥에 딸려오는 흙의 질척임이 가는 걸음을 방해하여 들풀이 자란 울퉁불퉁한 갓길로 걸으니 다리가 일찌감치 피로감을 느낄 것 같았다. 처음으로 하루종일 풀코스를 걷는 날이어서 걱정이 됐다. 이런 기상 상황과 길 상태에서 나의 체력은 어느 정도가 될까?
눈과 비와 숲과 길에서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전진을 하였다. 5시가 넘어가며 어제 저녁으로 먹은 빵을 떠올렸다. 너무 늦은 시간에 도착하면 저녁을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이나 마트가 있을지 걱정되었다. 핸드폰과 길을 번갈아 보면서 길을 재촉했다. 열었다고 표시된 숙소는 하나. 하지만 정확히 연 숙소인지는 도착해야만 알 수 있었고 어제도 숙소 근처에서 숙소를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맸었기 때문에 발걸음이 더 바빠졌다. 게다가 여전히 인기척 없는 깊은 산 속을 헤매고 있는 느낌의 질퍽한 길을 걷다보니 마을까지 갈 수 있을지도 염려되었다. 걱정과 염려가 밀려오는 와중에 느닷없이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한 길로만 난 길을 하루종일 걷다가 마을 초입에서 여러 갈래길이 나와 당황하여 마을 입구에 놓인 안내도를 들여다보았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고민하는데 멀리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수비리에 하나밖에 열지 않은 알베르게. '여기요!'라고 손짓하듯 들리는 휘파람 소리를 따라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어제 한 명의 한국인과 보낸 알베르게와 달리 오늘은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게다가 한국인은 아주머니 한 분과 갓 제대를 한 청년 한 명에 나까지 모두 셋. 아시아인들끼리 서로의 국적을 빠르게 확인하고 반가워했다.
2층 침대로 배정을 받고 짐을 빠르게 두고는 샤워를 했다. 더운데 추운 날의 여정. 처음으로 써 보는 2층 침대. 씻고 나서 잠시 쉬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가는데 아픈 다리가 더 진하게 느껴져 왔다.
저녁 식사와 반찬을 마련하자는 제안에 함께 밖으로 나왔다. 서로의 통성명과 짧은 사연들을 주고 받으며 마트로 가는 길은 아스팔트로 잘 닦여 있었으나, 다리는 절뚝절뚝.
함께 저녁을 준비하고, 다른 외국인 팀과 식사를 나누며, 짧은 외국어 실력에 통역 도움을 받으며 이야기가 깊어지는 밤이었다. 삼겹살과 스파게티를 나눠먹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몸이 무거워 쉬고 싶기도 했으나,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나쁘지도 않았으며, 마냥 신기한 부분도 있었다. 졸린데도 잠들기 싫은 어린애 마냥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들 제각각의 이유들로 이 길을 걸으며, 무언가를 얻어가려하는구나. 그런 생각들로 위안도, 동질감도, 따뜻함도 모두 함께 느껴지는 대화였다. 이안의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도 모두 낯설고도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문득 내일 일정이 걱정되던 때에, 다들 내일의 일정을 공유하였다. 그들은 모두 팜플로나까지 걷는다고 하였다. 대도시이며 구경할 것들, 먹을 것들이 즐비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들보다 먼 거리를 걷기로 작정했다. 외국어가 서툰 나로서는 그들과의 동행이 나쁠 것 같지 않았고 대도시에서의 관광이 포함된 일정 역시 나쁠 것 같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의지하려 했던 길도 아니고 나에게만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대도시에서의 관광이 걷기로 작정한 나의 일정에 3일째만에 끼어든다는 것이 내가 계획한 카미노 길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 길의 의미를 대도시에 마련된 여러 명소들에서 더 깊이 느끼고 체감할 수도 있었던 것도 같은데, 그때 내 마음은 무언가에 쫓기듯 바빴고 오늘처럼 온종일 내 몸을 혹사시켜야만 맞는 것이라는 고집이 단단하였었다.
그러나 어제는 워밍업. 오늘은 온전히 하루를 꼬박 걸은 첫날. 잠들기도 전에 다리에 알이 밴 것을 느끼는 지금의 컨디션으로 내일 잘 일어나고 잘 걸을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컨디션에 맞춰서 걷기 어려우면 팜플로나에서 쉬지 뭐. 하지만 걸을 수 있을 때까진 걸어보자.'라고 마음을 먹었다.
저녁 식사를 정리하고, 우선 짐을 줄여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줄일 수 있는 짐이라고는 도통 보이지 않았다. 결국 가져온 책 두 권 중 오는 길에 모두 읽어버린 어린왕자를 책꽂이에 두었다. 누군가에게 읽히는 의미 있는 한국어 책이 되어주길. 그리고 내 자리로 돌아와 골프공으로 허벅지, 종아리를 문지르며, 지도를 보며, 오늘 걸어온 거리를 재며 내일을 고민하였다. 그리고 어느새 잠이 들었다.
- 리오 아르가 호스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