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부분 줄거리
새로 파수꾼이 된 소년 ‘다’는 망루가 세워진 황야로 온다. 파수꾼 ‘가’가 망루 위에서 “이리 떼다, 이리 떼! 이리 떼가 몰려온다!” 라고 외치면 파수꾼 ‘나’는 망루 아래에서 북을 두드려 마을에 알린다. 마을 사람들은 파수꾼의 북소리를 듣고 허둥대다가 지붕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고, 우물에 빠져 죽기도 한다. 어느 날 ‘다’는 처음부터 이리 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적은 편지를 망루로 보급품을 날라 주는 운반인에게 부탁하여 촌장에게 보낸다. 편지를 전하기 전에 내용을 읽어 본 운반인은 이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퍼뜨린다.
학습 본문
해설자, 퇴장. 사이. 파수꾼 나가 들어온다.
나 : 아침 식사 하겠니?
다 : 지금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나 : 무얼 좀 먹어야 기운이 나는 거란다. 얘, 남은 닭고기 너나 먹으렴. (음식 담긴 접시를 다에게 가져가 턱 밑에 받쳐 든다.) 네 얼굴이 핼쑥하다. 몹시 아프니?
다 : 파수꾼님…….
나 : 응?
다 : 이리는 정말 없는 거죠?
나 : 오호라, 넌 이리가 무서워서 병난 거구나. 요 겁쟁이, 우리 양철 북을 두드리자. 그걸 힘껏 두드리고 있노라면 이리 떼가 덜 무서워질 거야.
다 : 양철 북을 쳐요?
나 : 그래. 치는 법을 가르쳐 주마.
다 : 소용없어요, 그건. 사실을 말씀드리죠. 오늘 새벽 눈을 뜨고 있던 건 저뿐이었어요. 모두들 잠을 잤고요. 그 틈을 노려 이리 떼가 습격해 오면 어쩌나 하고 전 두려웠어요. 그래서요, 저는 망루 위에 올라갔던 거예요. 그 높은 곳에서 저는 이 황야의 전부를 바라보았죠. 아무 데도 이리는 없더군요. 보이는 거라고는 저 멀리 하늘가에 흰 구름뿐이었어요. 그걸 향해 망루 위의 파수꾼은 “이리 떼다!” 외쳤습니다. 세 번이나요, 세 번. 저는 망루 위에서 그걸 제 눈으로 보았어요. 이리 떼라곤 없어요. 흰 구름뿐이에요.
나 : 얘야, 난 네 마음을 안다. 넌 망루 위엘 올라가고 싶었겠지? 이리가 무서웠고. 더구나 어린 너에겐 이 쓸쓸한 곳이 맞질 않는다. 그래서 넌 헛소리를 하는 거야.
다 : 저는 정말 망루 위에 올라갔었어요.
나 : 그럴 리 없어. 넌 아까부터 제정신이 아니더라. 덫으로 어찌 구름을 잡겠느냐고 횡설수설할 때부터 난 걱정스러웠다. 제발, 이리 떼가 없다는 소린 하지도 마라.
다 : 여기 낮은 곳에 있으니까 모르는 거예요. 하지만 저 높은 곳엘 올라가면 이리 떼가 없다는 걸 알게 돼요.
나 : 얘야, 자꾸만 우기지 마라. 나는 이 황야에서 평생을 지냈단다. 넌 여기 온 지 겨우 사흘밖엔 안 됐고. 그런데, 사흘밖에 안 된 네가 평생을 보낸 나보다 뭘 잘 안다고 그러니?
가 : 이리 떼다, 이리 떼! 이리 떼가 몰려온다!
파수꾼 : 나는 확신 있게 양철 북을 두드린다. 다는 여느 때와는 달리 침착하게 일어선다. 그리고 담요를 벗어 네모반듯이 갠 다음 식탁 위에 놓는다. 그는 북을 두드리는 나를 바라보면서 몹시 안타까운 표정이 된다.
가 : 북소리 중지! 이리 떼는 물러갔다!
다 : 정말 이리가 있다고 믿으세요?
나 : 보렴, 방금도 이리 떼가 오질 않았니?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양철 북을 치며 평생을 보냈겠느냐? 서운하다. 아무리 아픈 애라지만 너무 심한 말을 하는구나.
다 : 죄송해요. 하지만 어쩜 그 많은 나날을 단 한 번도 의심 없이 보내셨어요?
나 : 넌 그렇게도 무섭니, 이리가?
다 : 오히려 이리가 있다고 믿었던 때가 좋았던 것 같아요. 그땐 숨기라도 했으니까요. 땅에 엎드리면 아늑하게 느껴졌어요. 지금은요, 이리가 없으니 땅에 엎드려야 아무 소용 없고요, 양철 북도 쓸모가 없게 됐어요. 오직 이제는 제가 본 그 사실만을 말하고 싶어요.
해설자, 촌장이 되어 등장. 검은 옷차림. 이해심이 많아 보이는 얼굴과 정중한 태도.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한다.
촌장 : 수고하시는군요, 파수꾼님.
나 : 아, 촌장님. 여긴 웬일이십니까?
촌장 : 추억을 더듬으러 왔습니다. 이 황야는 내가 어린 시절 야생 딸기를 따러 오곤 했던 곳이지요. 그땐 이리가 무섭지도 않았나 봐요. 여기저기 덫이 깔려있고 망루 위의 파수꾼이 외치는데도 어린 난 딸기 따기에만 열중했었으니까요. 그 즐거웠던 옛 추억, 오늘 아침 나는 그 추억을 상기시켜 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래 이곳엘 찾아온 거예요.
나 : 잘 오셨습니다, 촌장님.
촌장 : 오래 뵙지 못했더니 그동안 흰머리가 더 많아지셨군요.
나 : 촌장님도요, 더 늙으셨어요.
촌장 : 오다 보니까 저쪽 덫에 이리가 치어 있습니다.
나 : 이리요? 어느 쪽이요?
촌장 : 저쪽요, 저쪽. 찔레 덩굴 밑이던가요…….
나 : 드디어 잡는군요!
파수꾼 나 퇴장. 촌장은 편지를 꺼내다에게 보인다.
촌장 : 이것, 네가 보낸 거니?
다 : 네, 촌장님.
촌장 : 나를 이곳에 오도록 해서 고맙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건, 이 편지를 가져온 운반인이 도중에서 읽어 본 모양이더라. “이리 떼는 없고, 흰 구름뿐.” 그 수다쟁이가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있단다. 조금 후엔 모두들 이곳으로 몰려올 거야. 물론 네 탓은 아니다. 넌 나 혼자만을 와 달라고 하지 않았니? 몰려오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불청객이지. 더구나 어떤 사람은 도끼까지 들고 온다더라.
다 : 도끼는 왜 들고 와요?
촌장 : 망루를 부순다고 그런단다. “이리 떼는 없고, 흰 구름뿐.” 그것이 구호처럼 외쳐지고 있어. 그 성난 사람들만 오지 않는다면 난 너하고 딸기라도 따러 가고 싶다. 난 어디에 딸기가 많은지 알고 있거든. 이리 떼를 주의하라는 팻말 밑엔 으레 잘 익은 딸기가 가득하단다.
다 : 촌장님은 이리가 무섭지 않으세요?
촌장 : 없는 걸 왜 무서워하겠니?
다 : 촌장님도 아시는군요?
촌장 : 난 알고 있지.
다 : 아셨으면서 왜 숨기셨죠? 모든 사람들에게, 저 덫을 보러 간 파수꾼에게 왜 말하지 않은 거예요?
촌장 : 말해 주지 않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다 : 거짓말 마세요, 촌장님! 일생을 이 쓸쓸한 곳에서 보내는 것이 더 좋아요? 사람들도 그렇죠! “이리 떼가 몰려온다.” 이 헛된 두려움에 시달리는데 그게 더 좋아요?
촌장 : 얘야, 이리 떼는 처음부터 없었다. 없는 걸 좀 두려워한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나쁘다는 거냐?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이리에게 물리지 않았단다. 마을은 늘 안전했어. 그리고 사람들은 이리 떼에 대항하기 위해서 단결했다. 그들은 질서를 만든 거야. 질서, 그게 뭔지 넌 알기나 하니? 모를 거야, 너는. 그건 마을을 지켜 주는 거란다. 물론 저 충직한 파수꾼에겐 미안해. 수천 개의 쓸모없는 덫들을 보살피고 양철 북을 요란하게 두들겼다. 허나 말이다, 그의 일생이 그저 헛되다고만 할 순 없어. 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고귀하게 희생한 거야. 난 네가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만약 네가 새벽에 보았다는 구름만을 고집한다면, 이런 것들은 모두 허사가 된다. 저 파수꾼은 늙도록 헛북이나 친 것이 되고, 마을의 질서는 무너져 버린다. 얘야, 넌 이렇게 모든 걸 헛되게 하고 싶진 않겠지?
다 : 왜 제가 헛된 짓을 해요? 제가 본 흰 구름은 아름답고 평화로웠어요. 저는 그걸 보여 주려는 겁니다. 이제 곧 마을 사람들이 온다죠? 잘됐어요. 저는 망루 위에 올라가서 외치겠어요.
촌장 : 뭐라고?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킨 후에 웃으며) 사실 우습기도 해. 이리 떼? 그게 뭐냐? 있지도 않은 그걸 이 황야에 가득 길러 놓고, 마을엔 가시 울타리를 둘렀다. 망루도 세웠고, 양철 북도 두들기고, 마을 사람들은 무서워서 떨기도 한다. 아하, 언제부터 내가 이런 거짓 놀이에 익숙해졌는지 모른다만, 나도 알고는 있지. 이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다는 걸 말이다.
다 : 그럼 촌장님, 저와 같이 망루 위에 올라가요. 그리고 함께 외치세요.
촌장 : 그래, 외치마.
다 : 아, 이젠 됐어요!
촌장 : (혼잣말처럼) …… 그러나 잘될까? 흰 구름, 허공에 뜬 그것만 가지고 마을이 잘 유지될까? 오히려 이리 떼가 더 좋은 건 아닐지 몰라.
다 : 뭘 망설이시죠?
촌장 : 아냐, 아무것도……. 난 아직 안심이 안 돼서 그래. (온화한 얼굴에서 혀가 날름 나왔다가 들어간다.) 지금 사람들은 도끼까지 들고 온다잖니? 망루를 부순 다음엔 속은 것에 더욱 화를 낼 거야! 아마 날 죽이려고 덤빌지도 몰라. 아니 꼭 그럴 거다. 그럼 뭐냐? 지금까진 이리에게 물려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는데, 흰 구름의 첫날 살인이 벌어진다.
다 : 살인이라고요?
촌장 : 그래, 살인이지. (난폭하게) 생각해 보렴, 도끼에 찍힌 내 모습을. 피가 샘솟 듯 흘러내릴 거다. 끔찍해. 얘, 너는 내가 그런 꼴이 되길 바라고 있지?
다 : 아니에요, 그건!
촌장 : 아니라고? 그렇지만 내가 변명할 시간이 어디 있니? 난 마을 사람들에게 왜 이리 떼를 만들었던가, 그걸 알려 줘야 해. 그럼 그들도 날 이해해 줄 거야.
다 : 네, 그렇게 말씀하세요.
촌장 : 허나 내가 말할 틈이 없다. 사람들이 오면, 넌 흰 구름이라 외칠 거고, 사람들은 분노하여 도끼를 휘두를 테고, 그럼 나는, 나는……. (은밀한 목소리로) 얘, 네가 본 그 흰 구름 있잖니, 그건 내일이면 사라지고 없는 거냐?
다 : 아뇨. 그렇지만 난 오늘 외치고 싶어요.
촌장 : 그것 봐. 넌 내 피를 보고 싶은 거야. 더구나 더 나쁜 건, 넌 흰 구름을 믿지도 않아. 내일이면 변할 것 같으니까, 오늘 꼭 외치려고 그러는 거지. 아하, 넌 네가 본 그 아름다운 걸 믿지도 않는구나!
다 : (창백해지며) 그건, 그건 아니에요!
촌장 : 그래? 그럼 너는 내일까지 기다려야 해. (괴로워하는 파수꾼 다를 껴안으며) 오늘은 나에게 맡겨라. 그러면 나도 내일은 너를 따라 흰 구름이라 외칠 테니.
다 : 꼭 약속하시는 거죠?
촌장 : 물론 약속하지.
다 : 정말이죠, 정말?
촌장 : 그럼. 정말 약속한다니까.
파수꾼 나가 들어온다.
나 : 또, 헛치었습니다. 이리는 워낙 교활해서요, 친 것 같아도 가 보면 달아나고 없어요.
촌장 : 다음에는 꼭 잡히겠지요.
나 : 미안합니다. 이번에 잡았더라면 그 껍질을 촌장님께 선사하고 싶었는데…….
촌장 : 받은 거나 다름없이 감사합니다.
나 : (촌장에게 안겨 있는 다를 가리키며) 그 앤 지금 몹시 아픕니다.
촌장 : 네. 열이 있는 것 같군요.
다 : 간밤에 담요를 덮지 않아서 병이 났어요.
촌장 : 이만한 나이 때 누구나 한 번씩은 앓는 병이겠지요.
나 : 내 잘못이었어요. 담요를 꼭 덮어 줘야 하는 건데. (다에게) 얘야, 난 널 좋아해. 아픈 것 빨리 좀 나아 주렴.
다 : (힘없이 웃으며) …… 고마워요.
나 : (관객석 쪽으로 돌아서다가, 흠칫 놀라며) 웬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오죠?
촌장 : 마을 사람들이죠.
나 : 마을 사람들요?
촌장 : (관객들을 향해) 어서 오십시오, 주민 여러분. 이 애가 그 말을 꺼낸 파수꾼입니다. 저기 빙긋 웃고 있는 식량 운반인, 이 애가 틀림없지요? 네, 그렇다고 확인했습니다. 이리 떼인지 아니면 흰 구름인지, 직접 이 아이의 입을 통하여 들어 봅시다.
파수꾼 다, 쓰러질 것 같은 걸음으로 망루를 향해 걸어간다. 나가 근심스럽게 쫓아간다.
나 : 얘야, 괜찮겠니?
다 : …… 네.
나 :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구나. 넌 이리 떼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떠는 겁쟁이인데. 망루 위에 올라가서 엎드리면 안 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널 보러 오지 않았니? 얼마나 큰 영광이냐. 이 기회에 말이다, 넌 너 자신이 파수꾼이라는 걸 힘껏 자랑해야 한다. 알았지, 응?
촌장 : 그만 올라가게 하십시오.
파수꾼 다는 망루 위에 올라간다. 긴 침묵. 마침내 부르짖는다.
다 : 이리 떼다, 이리 떼! 이리 떼가 몰려온다!
파수꾼 가의 손이 번쩍 들려지며 그도 외친다. 파수꾼 나는 신이 나서 양철 북을 두드린다. 북소리, 한동안 계속된다.
가 : 북소리 중지! 이리 떼는 물러갔다!
촌장 : 주민 여러분! 이것으로 진상은 밝혀졌습니다. 흰 구름은 없으며 이리 떼뿐입니다. 이 망루는 영구히 유지되어야겠지요. 양철 북도 계속 쳐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다음 이리의 습격 때까진 잠시 시간적 여유가 있습니다. 그틈을 이용하여 돌아가십시오. 가시거든 마을 광장에 다시 모이시기 바랍니다. 수다쟁이 운반인의 처벌을 논의합시다. 그럼 어서 돌아가십시오. 이리 떼가 여러분을 물어뜯으러 옵니다.
망루 위에서 파수꾼 다가 내려온다.
나 : 난 네가 이렇게 용감해질 줄은 몰랐구나.
촌장 : 고맙다. 정말 잘해 주었다.
나 : 아냐, 난 몰랐던 건 아니었어. 넌 나에게 용감한 사람이 되마고 약속하질 않았니? 난 그때 이미 알아본 거야, 넌 꼭 훌륭한 파수꾼이 될 거라고.
촌장 : 얘, 나 좀 보자. (한갓진 곳으로 데리고 가서) 너한테는 안됐다만, 넌 이곳에서 일생을 지내야 한다.
다 : …… 네?
촌장 : 마을엔 오지 마라.
다 : (침묵)
바람 부는 소리가 거칠게 들려온다.
촌장 : 난 저 사람들이 싫어. 내 마음은 너와 함께 딸기 따기에 가 있다. 넌 내 추억이야. 너에게는 내가 늘 그리워하던 것이 있다.
사이.
촌장 : …… 하지만, 여긴 너무 쓸쓸해.
사이.
촌장 : 그럼, 잘 있거라.
나 : 가시려고요, 촌장님?
촌장 :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나 : 제가 저만큼 바래다 드리지요. 덫도 좀 살펴볼 겸 해서요. (함께 걸어가며) 그런데 말입니다, 양철 북을 치던 내 모습이 멋있지 않던가요?
촌장과 파수꾼 나, 퇴장한다. 바람 소리만이 더욱 거칠어진다. 잠시 후, 망루 위의 파수꾼이 “이리 떼다!” 외친다. 파수꾼 다는 조용히 양철 북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