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부분 줄거리
고등학교 2학년 새학기, 자율이라는 말로 학생들을 묶으면서 군림하고 싶어하는 담임 선생님에게 내(이유대)가 자율의 의미를 되묻자 당돌함을 높이 평가한 담임 선생님은 임시 반장에 임명한다. 이런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최기표와 재수파 일당은 나에게 집단 린치를 가한다.
임형우가 정식 반장으로 임명이 되고 담임 선생님의 묵인 하에 유급 위기에 처한 기표의 커닝을 돕는다. 기표는 시험 도중 커닝 사실을 감독관에게 밝히지만 여러 학생들이 참여했음을 스스로 밝히자 없던 일이 되어버린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기표는 임형우에게 집단 린치를 가하여 입원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끝까지 학교 측에 가해자가 기표임을 밝히지 않자, 임형우는 학생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존재감을 키우게 된다.
학습 본문
“그 새낀 악마다.”
형우가 동정어린 눈으로 나를 충동질했다. 그러나 나는 대답없이 빙그레 웃어 보였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게 해 보였다. 그것은 이미 겪은 우월감 같은 오만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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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기표는 유급생인데다 여러 번 정학을 당했잖아요. 그런 아이를 간부로 임명하면 아이들이 좋지 않게 생각할 겁니다.”
기표가 학교의 지시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교단 위에 서서 아이들한테 애원하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불쾌했다. 누가 사자를 울 속에 넣어 길들이는 발상을 처음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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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표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악마의 자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얘기가 통할 만한 집안의 어떤 형에게 말했더니 그가 대답했다.
- 맞아. 신이 매우 거북하게 생각하는 악마란 바로 네가 말한 놈처럼 착함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런 순수한 악마지. 그러한 순수한 악마만이 신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에 신은 마음속으로 괴로운 거야. 그렇기 때문에 신은 결코 악마를 영원히 추방하지 않아. 항상 곁에 두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일에 그것을 이용할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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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우가 병원에서 퇴원을 해 2주일 만에 학교에 나왔다. 악수 세례가 쏟아지고, 등을 두드리고, 체육시간에는 헹가래까지 시키려고 했지만 형우가 도망을 쳤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들은 숨죽여 기표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의 차가운 시선에 부딪친 아이들은 섬뜩한 느낌으로 고개를 돌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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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커닝을 도와준 것이 기표의 비위를 상하게 한 모양이지?”
“글쎄 그런 것 같았다.”
형우가 짐짓 좌우를 둘러보면서 대답했다.
“그때 그 일, 담임 선생님이 시켜서 한 거지?”
내가 넘겨짚자 형우가 한순간 당황하는 것 같았다. 언제고 밝히고 싶었던 것이라 나는 다시 다그쳤다.
“그렇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 문제를
“합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냐?”
“아니다. 담임 선생님이 기표를 나한테 일임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그랬겠지. 형우야, 넌 지금 네가 기표를 구원했다고 보니?”
“아직 완전히는 …… 그러나 머지않았다.”
나는 웃어 주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그런데?”
“이제 그 조직은 없어졌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냐?”
“내가 병원에 있을 때
“기표두 왔었니?”
내가 헐떡이면서 물었다.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테지.
“그래, 다른 애들이 너한테 사과를 했다고 해서 재수파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일 거야.”
“물론 겉으로야 그대로 남아 있겠지. 그러나 그들은 이미 이빨 뺀 뱀이나 다름없어. 걔들이 모두 나한테 말했다. 기표는 악마라고. 자기들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귀라고.”
형우와 갈라서야 하는 길목에 와 있었다. 나는 형우네 집 쪽으로 따라가며 물었다.
“너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냐?”
형우가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기표는 다 아는 것처럼 가난한 집 애다. 거기다가 그 부모가 다 병들어 누워 있다. 시집간 기표 누나가 주는 돈으로 겨우겨우 먹고산댄다. 기표 동생이 셋이나 있다. 기표 바로 밑의 동생이 버스 안내원을 해서 생활비를 보탰는데 요즘 무슨 일로 해서 그것도 그만두었다. 아무튼 생활이 말두 아니란 거야. 재수파들이 매달 얼마씩 모아 생활비를 보태 줬다는 거야. 집에서 돈을 뜯어낼 수 없는 애들은 혈액은행에 가 피를 뽑아 그 돈을 내놓았다는 거다.”
“그렇게 해 달라고 기표가 강요한 건 아닐 텐데.”
“마찬가지다. 재수파들도 기표가 무서웠다는 거야.”
“지금도 무서워하고 있을걸.”
“그렇지 않아.”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혈색이 더 좋아진 형우가 자신 있게 말했다.
“이제 아무도 기표를 무서워하지 않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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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선생이 교단에서 내려서고 그 대신 반장 임형우가 사뭇 엄숙한 표정으로 단 위에 섰다.
“담임 선생님의 말씀처럼 지금 우리 친구 하나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힘을 합쳐 그 친구를 구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서두를 잡은 형우는 언젠가 하굣길에서 내게 들려준 기표네 가정 형편을 반 아이들한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기표 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는 정경이며 기표 어머니의 심장병, 그러한 부모들을 위해서 버스 안내원을 하던 기표 여동생의 눈물겨운 얘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기표네 식구들의 배고픔이 눈에 보이듯 열거되었다. 그런 가난 속에서도 가난을 결코 겉에 나타내지 않고 묵묵히 학교에 나온 기표의 의지가 또한 높게 치하되었다. 더구나 그런 가난 속에서도 유급을 했기 때문에 일 년간의 학비를 더 마련해야 했던 그 고통스러운 얘기도 우리들 가슴에 뭉클 뭔가 던져 주었다.
“나는 얼마 전 기표가 버스 안내원을 하던 여동생을 몹시 때린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 여동생 몸이 약해 버스 안내원을 그만두었던 것인데 생활이 더 어렵게 되자 돈을 벌기 위해 술집에 나가기로 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여동생이 앞으로 어떤 무서운 수렁에 떨어져 내릴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반 아이들은 사뭇 숙연한 자세로 형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형우는 기표네 가정 사정을 낱낱이 얘기함으로써 이제까지 우리들에게 신화적 존재로 군림해 온 기표의 허상을 빈곤이라는 그 역겨운 것의 한 자락에 붙들어 맨 다음 벌거벗기려 하는 것 같았다. 기표는 판잣집 그 냄새나는 어둑한 방에서 라면 가락을 허겁지겁 건져 먹는 한 마리 동정받아 마땅한 벌레로 변신되어 나타났다.
“한 가지 또 알려 줄 게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처지의 친구를 위해서 이제까지 남이 모르게 도와 온 우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표의 가까운 친구들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이 재수파라고 불러온 아이들입니다. 우리들이 무시해 온
아이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깊은 감동의 강물이 모두의 가슴 한가운데를 출렁이며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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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랍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우리들 앞에 내던졌다. 기표가 바로 밑의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였다. 편지 맨 앞줄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뒷부분 줄거리 요약
형우는 주도면밀하게 기표의 불우한 가정사를 모두 드러내어 이를 그간의 문제행동에 대한 원인으로 지목하고, 효자요, 여동생을 걱정하는 오빠로 미화시켜 학생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유발함과 동시에 자발적으로 모금운동에 참여하게 만든다. 이후 더이상 기표에게서는 카리스마는 보이지 않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아이로 변해버린다.
이렇게 왜곡되고 각색된 기표의 미담은 지역 신문사와 지역 사회로 퍼져 나가 영화화하기에 이른다. 이에 기표는 바로 밑의 여동생에게 편지를 남기고 가출을 한다.